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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정류장

철조망 너머에서 온 위로

마음이 고통으로 새빨갛게 물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그때의 나는 현실이 이미 생지옥처럼 느껴졌다.

정신과 마음과 몸이 숨을 쉬지 못할 만큼 답답했다.

어디에도 기대지 못했고, 아무에게도 닿지 못했다.

삶을 내 힘으로 끝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때의 내게는 그것이 이 생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 삶의 끝을 정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뿐이라고 믿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이 견딜 만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때 내게 필요했던 것은 답이 아니었다.

그저 숨 쉴 곳이 필요했다.

겨울의 황량함 속에서도 푸르게 살아 있는 호밀밭.

바람에 흔들리며 물결치는 그 풍경을 보고 싶었다.

그날은 오후였다.

하늘은 조금 흐렸고 겨울이었다.

대부분의 초목은 빛을 잃고 황량해져 있었지만, 호밀은 달랐다.

길게 자란 호밀은 겨울 속에서도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초록의 줄기들이 바람이 시키는 대로 마치 물결처럼 흔들렸다.

사사삭.

사사사삭.

풀잎들이 서로 비비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참 좋았다.

세상이 아직 완전히 마른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곳은 고양시에 있는 한우종자개량소 목장이었다.

예전에 사진을 찍으러 몇 번 찾아간 적이 있던 곳이었다.

넓은 초원과 호밀밭, 그리고 그 너머의 종마목장.

두 공간은 철조망을 경계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호밀밭을 바라보다가, 멀리 있는 말 한 마리를 보았다.

2~300m쯤 떨어져 있었을까.

말은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고 있었다.

아주 평범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고개를 숙인 채 풀을 뜯고 있던 말의 눈이, 순간 크게 열린 것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 먼 거리에서 말의 눈꺼풀이 더 열리는 것을 내가 보았다는 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빛의 변화였을 수도 있고, 말의 얼굴 각도가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 감각이 너무 지쳐 있어서 어떤 작은 변화를 크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감각에는 분명히 그렇게 들어왔다.

말의 눈이 확 열렸다.

나는 믿기지 않아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뒤, 말이 고개를 들었다.

말은 나를 바라보았다.

그다음에는 더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말이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말은 급하게 달려오지 않았다.

놀라서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나와 말 사이에는 가시 철조망이 있었다.

말은 철조망 앞에 멈추더니, 그 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큰 얼굴이 뾰족한 가시에 긁힐까 봐 나는 나도 모르게 철조망 틈을 넓혀보려 했다.

하지만 충분히 넓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

철조망 사이로 조금씩 고개를 내밀며 나와 가까워지려 했다.

우리 사이에는 분명히 막힌 것이 있었다.

뾰족한 철조망이 있었고,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 말은 내게 다가왔다.

나는 손을 뻗어 말의 뺨을 만졌다.

말은 살아 있는 온기를 품고 있었다.

나는 그 온기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때 말이 낮고 작은 소리를 냈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마치 이렇게 들리는 것 같았다.

말하지 못하는 말이 말보다 더 깊게 내 안에 들어왔다.

 

괜찮다.

괜찮다.

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무하고도 교감하지 못하던 시간이었다.

사람에게도, 세상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닿지 못하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한 마리의 말이 나에게 다가와 있었다.

말하지 못하는 말이,

말보다 더 깊은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에게 고마웠다.

그 말이 왜 내게 다가왔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정말 나를 알아본 것인지, 단지 호기심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나는 분명히 느꼈다.

그 말은 나를 구원했다기보다, 나를 발견해주었다.

그 말이 내 인생을 해결해준 것은 아니다.

내 고통이 그 자리에서 모두 사라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조금 더 버틸 힘을 얻었다.

철조망 너머에서 다가온 한 생명 때문에, 나는 내가 아직 완전히 버려진 존재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 말은 사람의 언어로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낮고 작은 소리로 내 곁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감동 속에서, 내가 아직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장면을 떠올린다.

그때 왜 그렇게 보였을까.

정말 말의 눈꺼풀이 열린 것일까.

아니면 내 고통이 그 장면을 그렇게 받아들인 것일까.

답은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순간 내 감각으로 느낀 것은 진짜였다.

어쩌면 그날의 만남은 내가 내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첫 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말이 나를 보았는지, 내가 그 말에게서 나를 보았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날 철조망 너머에서 한 생명이 내게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그 생명에게서, 아주 조용한 위로를 받았다.